[리처드 로어 신부 강론]

단순(單純)함 Simplicity

머리말

모더니즘의 신화가 여기저기에서 죽어가고 있다. 우리의 치밀한 이론과 복잡성이 자멸하는 중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는, 특히 서구에서, 발전과 이성(理性)과 고도의 기술공학이 인간 딜레마를 해결해주리라고 확신해왔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하는 마음(mind)과 과학이 주는 선물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들의 메시아적 약속을 의심하고 있다. 더 많은 분석이 더 많은 지혜를 의미하는 건 아니고, 더 많은 선택사항이 더 많은 자유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물건들을 많이 쌓아둔다고 해서 더 많이 행복한 게 아니고, 축적된 시간이 깊은 사색(思索)에 쓰이는 것도 아니다.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너무 넓은 대지가 희생되고 있으며, 인간 이성은 너무 쉽게 전쟁, 탐욕, 개인의 이익 추구를 정당화하고, 기술공학은 그것에 종사하는 사람들 특히 군대와 의료계에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고 있다. 개발철학은 우리를 이끌어 자기들이 무한한 존재인 줄로 믿게 하고, ‘지금’의 신비와 질(質) 대신에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종교는 그나마 잘하는 게 있다면 사물의 깊이와 넓이와 경이로움에 관심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참을성 없고 비(非)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유월절 신비, 만물의 음(陰)과 양(陽)이 최근 유행하면서 입증되지 않은 슬로건, “우리는 할 수 있다!”의 함성에 파묻혀 거의 들리지도 않는다.

T. S. 엘리엇은 그의 사중주(四重奏) ‘작은 현기증’에서 이 선택된 맹목(盲目)과 씨름하고 있다.

찾지 않았기에 알지는 못하지만

바다의 두 파도 사이

그 고요 속에서 들리는, 절반쯤 들리는

지금, 여기 그리고 늘―

(모든 것을 값으로 지불한)

 

완전 단순함의 조건

물론 지불할 대가(代價)가 문제다. 교회의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는 약속과 그에 대한 값을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다. 대가 없는 약속은 달콤한 감상주의가 되고 약속 없는 대가는 부끄럽고 무거운 짐이 된다. 우리는 이 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누가 ‘완전 단순함의 조건’(a condition of complete simplicity)으로 돌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가리켜줄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리로 가기를 원하는가? 나는 개인과 교회를 함께 치료하는 신성한 요법이 있다고 믿는다. 급진적 묵상의 발걸음(radical contemplative stance)이 그것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그것을 가리켜, ‘사계(四季) 철학’이라고 말한 것은 바른 표현이다. 그것은 잘 보고 잘 듣는 데서 오는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그 값으로 모든 것을 지불해야 한다.

 

너에게 없는 즐거움으로 오려면 그 안에서 네가 즐겁지 않은 길로 가야 한다.

너에게 없는 앎으로 오려면 그 안에서 네가 아는 게 없는 길로 가야 한다.

너에게 없는 소유로 오려면 그 안에서 네가 가진 게 없는 길로 가야 한다.

너 아닌 무엇으로 되려면 그 안에서 네가 너 아닌 길로 가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

 

이것은 ‘인간 지혜’의 상실인데 모든 세대, 모든 종교들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은 결코 우리를 그리로 데려가지 못한다. 발전철학도, 효율성도, ‘자아-실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계시’로만 오는 것이다. 기다리고 필요하고 갈망해서 얻게 되는 놀라운 은총이다. 논리적인 귀결로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오직 ‘믿음’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나의 깨달음은 아주 더디게 왔다. 나는 지금 그것이 개인에게 어려운 일이듯이 교회에도 어려운 일임을 보고 있다.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둘이 자신의 불안한 여정을 피해보려고 서로를 비난하며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는 스스로 모범을 보이지 않는 무엇을 신자들에게 요구할 수 없고, 신자들은 스스로 감당하려 하지 않는 모험을 교회에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인가? 역사의 신성한 연금술은 분명한 답을 주지 않는다. 모어와 뉴먼이 영국교회를 이루었는가? 아니면 영국교회가 그들을 이루었는가? 그걸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야훼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시편 115, 1).

비난도 마찬가지다. 무슨 죄가 있으면 어디로든지 그 탓을 보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가혹하게 비난해왔고 부모, 제도 또는 역사를 향해서도 같은 비난을 퍼붓고 있다. 희생자와 희생시키는 자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그래서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어쩌면 예수가 우주의 희생자로 되면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자들을 비난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자기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가복음 23, 34).

 

우리는 준비되어 있고 그래서 자비가 필요하다. 사물의 고통스러운 신비, 그 모든 것들의 불의(不義), 축복에 혼합된 저주, 이런 것들은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다. 비난하거나 회피한다고 해서, 자기가 무엇을 통제하고 있다는 거짓된 느낌 말고는,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 역사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고 우리가 곧 역사다. 모든 일이 있는 그대로 일어날 수 있는 곳, 역사의 모든 것이 그 안에서 구원을 향하여 운반되고 있는 곳이 교회라고 말하면 교회에 대한 가장 근사한 설명이라 하겠다. 전체의 어느 부분을 따돌리거나 한 부분을 붙잡기 위하여 전체를 외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불구로 만들고 망가뜨리는 것이다.

교회의 신비를 믿는 것은, 이 지구별 위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기꺼이 교회의 의식수준과 문제들을 안고 그 역사와 더불어 씨름하는 것이다. 나는 ‘존재’의 바다에 위치한 내 장소에서 휴식하지 않고 “좋거나 나쁘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나의 ‘지금’을 살겠다. 이것이 나와 그리스도의 결혼이다. 다른 어떤 그리스도를 우리가 만날 수 있겠는가? 다른 어떤 그리스도(또는 교회)를 우리가 기대했던가? 어떤 이교도적 오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미래로 점프하거나 과거 속으로 완강하게 숨을 수 있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가?

하지만 교회를 믿기가 나로서는 무척 힘들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너무 느리고 비효과적이고 심지어 교회의 정책에 의하여 방해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 걸음 나아가고 두 걸음 물러서는 것이 교회의 유일한 전진방법인가? 사람들은 그래도 잘 참고 기다리는 것 같다, 적어도 나보다는! 주교들은 경건한 목소리로 생명-외경의 길을 가노라고 선언하면서 미국 정부에 의하여 살해된 이라크 사람들의 죽음을 조용히 재가(裁可)한다. 낙태, 사제의 결혼, 여성 사제, 동성애 등에 관하여는 하느님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것들에 관하여 예수는 말을 거의 하지 않거나 전혀 하지 않았는데) 전쟁, 빈부격차, 폭력 등에 관하여는 (그것들에 관하여 예수는 단호하게 말했는데)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면서도 편안하게 잘 살고 있다. 이것이 가톨릭 교권(敎權)인가? 교황은 세계 도처에 친환경 주교들을 임명하고 보편적, 다문화적 교회의 세부사항을 통제하면서 여전히 천주님, 사회정의, 하느님을 신뢰함에 대하여 권위 있는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더 이상 먹히지를 않는다.

개인들도 나을 것 하나 없다. 급진파 진보주의자들은 순종과 굴복을 자기들의 자유와 온전함에 대한 모독으로 본다. 정통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라는 말 자체를 고약한 단어로 보면서도 자유 시장 경제체제와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자유 앞에 공손히 무릎 꿇는다. 남성 가장(家長)들은 자기들이 어떤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순진한 무지 속에 머물러 있고, 여성운동가들은 남성 지배 여성 굴욕의 패러다임으로 전체 인류역사를 읽는다. 평신도 단체들은 한때 성직자 그룹의 전유물이던 자기 신념 제일주의와 에고의 발걸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토록 협소하고 불신에 가득 찬 인간들한테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빛나는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이토록 서로 분열되어 좋은 소식이라고는 좀처럼 들려주지 않는 인간들한테서 어떻게 진정한 복음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누구에게로 갈 것인가? “우리가 누구한테로 가겠습니까?”(요한복음 6, 68). 이는 예수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에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개인주의는 인간을 유별남과 교만으로 인도하고, 현대의 영적 절충주의는 결국 제가 저를 사랑하는 자기도취로 바뀌고, 문화적 나방이들은 온갖 유행의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나는 뉴멕시코에서 사방으로 다니며 사이비 인디언 영성을 사고파는 아메리칸 원주민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나 또한 내가 속한 프란체스코 전통의 창조영성을 방금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것인 양 과장되게 포장하였다.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열두 단계 프로그램’조차도 또 하나의 중독이 되어 인생의 고통이라는 신비를 외면하게 만든다.

 

똑바로 직시하자. 이 세상에는 인생의 고통을 없애버릴 그 어떤 집단도, 치료법도, 신학도, 신비스러운 의전(儀典)도 없다. 내 아무리 글 쓰는 재주가 많아도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서 삶의 신비를 졸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복음의 진리를 믿는다. 그래서 이렇게 용기를 내어 설교하고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나의 이런 작업이 조금이나마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주고 복음이 다시 복음으로, “만인의”(마르코복음 11, 17) 좋은 소식으로, 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또 나는 이 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두 가지 순진함(naivetes)을 분별할 수 있게 도와주기를 희망한다. 하나는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고 어디에도 연계되지 않는 위험한 단순함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기에 고요하고 알고 참고 자기를 버리는 복된 단순함이다. 이 가운데 후자가 복음을 모든 세대에 다시 살려준다.

 

수년 전에 나는 예상치 못했던 악성 색소과다증 수술을 받아야 했다. 나는 이 땅에서의 수명을 모두 채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하느님께 이유를 여쭈어보았다. 결국 그동안 풍요롭고 다양하게 놀라운 인생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되에 담아서”(루가복음 6, 38) 받으며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내가 “예, 좋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누군가 “아니다.”라고 말했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 내 무릎에 아직 남은 방이 있는 건가? 하느님 무릎에는 남은 방이 있는가? 있다는 쪽에 내기를 걸겠다. 거기에는 단순함을 위한 방이 언제든지 남아있다. 뉴멕시코, 행동과 묵상을 위한 센터에서

공동체 생활, 하나의 도전

나는 오하이오에 공동체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14년간 지도신부로 있다가 1996년에 놀라운 묵상의 한 해를 보내고는 곧장 뉴멕시코로 가서 그곳에 새 공동체를 설립했어요. 알부퀘크에 있는 우리 센터는 공동체라기보다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일꾼들을 위한 훈련원으로 보는 게 옳을 거예요. 우리는 영성과 사회정의를 함께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70년대 초부터 나는 ‘공동체들의 공동체’(Community of Communities, 아메리카 기초공동체 네트워크)에서 꽤 분주한 시절을 보냈지요. 체류자들을 위한 공동체와 잡지사를 설립하고 운영하던 짐 월리스와 함께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공동체들이 세워졌다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했고 그 이유가 늘 궁금했어요.

우리가 찾아낸 가장 그럴싸한 이유는 그들이 죽어라하고 자기들을 괴롭혔다는 겁니다. 동시에 그들이 사회정의실현과 영성생활을 조화롭게 일치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에요. ‘자기-치유’ 쪽으로 너무 쏠렸다가 스스로 자폭하는 공동체도 있었지요. 공동체가 세워진 지 2, 3년 지나면 많은 멤버들이 자문하게 됩니다. “내가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정치적 성격을 띤 많은 공동체들이 급진적 이상주의자들에게 끌려가다가 그들의 이상주의와 함께 무너지는 것도 보았어요. 그들은 현실보다 자기네 이상을 더 사랑했지요. 영성생활에 충실하지 않으면 구체적 현실보다 공동체의 이상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새로운 그룹을 만날 때마다 당신들의 기대(expectation)와 예상(presupposition)에 대하여 처음부터 정직해야 한다고,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지요. 물론 그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대부분이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그룹이니까. 사람들의 의식이 더디게 향상되는 오늘 우리네 문명사회에서는 공동체들이 자기 정체성을 문제 삼아야 하는 장소로 변질되기가 아주 쉬운 일이지요.

수도생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수련원 원장들마다 젊은 수련생들의 우왕좌왕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고 많은 애를 먹는데 이제 막 성인이 된 이십대를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이 자기 성장에 공동체를 이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하긴 현대 자본주의 안목으로 보면 크게 놀랄 일도 아닐 거예요. 요즘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자기 에고를 키우거나 풍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거든요. 그래서 공동체도 쉽게 하나의 소비재가 되고 그렇게 해서 한 번 사용하면 뒷전으로 밀쳐두지요. 심지어 결혼생활에서까지도 그런 모습이 보인다는 건 정말 불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현대사회는 오랜 전통을 유지해온 수도공동체들을 더 이상 전처럼 지원하지 않아요. 종교들마다 특별한 서원(誓願)이 있는데 사람들이 갈수록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청빈서원보다 독신서원의 경우가 더 심하지요.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독신생활을 선호하는 쪽으로 흐르는 건 엄연한 현실입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나 ‘유피 세대’만 해도 상류사회에서 초호화판 파티가 용납되는 분위기였지만 요즘은 자신의 경력을 쌓기보다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하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고 있어요. 많은 선교사들이 자기네 선교현장인 중남미 교회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지요. 우리는 중남미 교회들에 의해서 북미 교회들이 방향을 전환하리라고 확신합니다.

 

 

 

한 공동체에서 14년간 일한 나는 뭔가 다른 일을 뉴멕시코에서 해보고 싶었어요. 우리의 중심 목적은 새 공동체 하나를 세우는 게 아니라 세계를 섬기려는 비전을 지닌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을 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면 부산물로 다른 종류의 공동체가 생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그 뒤로 몇 년 세월이 흐른 지금 결과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게 필요하기도 했지만 실은 거의 우연히 그렇게 되었지요. 우리는 ‘어떻게’ 손을 잡을 것인지에 대하여 너무 많은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많은 공동체들이 스스로 무너질까봐 너무 많은 걱정을 했고 그래서 공동체의 체온을 재기 위하여 아침마다 체온계를 입에 물곤 했거든요.

 

나는 복음이 전 세계 사람들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부른다고 믿어요. 하지만 공동체는 하나의 예술작품이고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방법들은 다양하지요. 수도원에 살지만 공동체 생활을 할 자격도 실력도 없는 수도자들을 나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 안에 너무나 갇혀 있어요. 하지만 도시 아파트에 혼자 살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살아가는 수녀들도 많이 보았지요. 비결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삶 속으로 들어오게 허용하고 동시에 자신도 자기 밖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것은 한편으로 영성의 신비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나약함과 무력함의 신비인데 한 사람이 자기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지향하여 내면의 길을 갈 때, 그리하여 세상의 나약하고 무력한 사람들과 깊이 연루될 때, 그때 공동체가 열매로 맺혀지는 것입니다.

 

이 둘 중에 하나만 결핍돼도 사람들은 공동체로 나아가지 않을 거예요. 내적인 삶과 우리가 ‘정의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없이는 대부분의 공동체들이 자기들을 섬길 따름입니다. 이 문제는 태생적으로 자기도취가 심한 이 나라에서 더욱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할 거예요. 너무나 많은 가정들이 붕괴되면서 사람들이 진정한 ‘가정’을 경험해보려고 공동체의 문을 두드리는 게 현실이긴 한데 충분히 이해는 됩니다만 그들도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소경 문고리 잡는 격이긴 해도 부족한 우리 센터를 통해서 해방되고 치유되는 사람들을 나는 보았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치유하는 데 삶의 모든 것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치유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니까요. 우리 문제를 위하여 시간을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래도 치유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공동체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센터의 생활방식

우리 센터의 배경이 될 만한 메타포는 ‘예언자들을 위한 학교’(a school for prophets)입니다. 정문에 간판으로 내걸지는 않았어도 우리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의 희망이긴 하지만, 그것이 프란체스코 신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다행히 여러 주교님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이런 나를 지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에 근거하여 창조적인 비판을 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요. 교회가 다른 모든 카리스마를 장려하면서 예언의 카리스마만 제외시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짧으면 두 주간 길면 두 달 코스로 진행되는 ‘실습강좌’를 받기 위해서 우리 센터로 오지요. 우리는 연중무휴로 피정, 세미나, 워크숍 등을 가집니다. 사람들이 미리 자기 사정을 글로 제출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맞춤형으로 작성하는데 그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언제나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 말하자면 수감자들, 노숙자들, 난민들, 거리의 여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거예요. 밤이면 센터에서 집단작업이나 강좌가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지요. 참가자들 모두에게 진행과정을 잘 소화하도록 도와주는 영적 안내자들이 따로 있어요. 강좌의 주요 포인트는 해방신학의 틀에서 성직자들의 눈이 아니라 여성들이나 제3세계 민중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겁니다.

 

우리는 ‘묵상기도’를 많이 강조해요.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했고 토론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가톨릭에서 신부가 주도하는 공동기도를 회중한테 요구한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성직자들이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자기 에고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자기 생각과 느낌에 끌려 다니지 않는 그런 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묵상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았고 그 아름다운 열매를 이미 맛보고 있지요.

 

센터의 하루하루가 20분 묵상으로 시작됩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거예요. 우리는 센터에서 사회분석도 가르치지요. 미국사람들은 좀 나이브한 면이 있어요. 사람을 ‘아메리칸’ 아니면 ‘코뮤니스트’로 보는 겁니다. 이제 더는 러시아를 적국으로 볼 수 없는 까닭에 그런 생각이 바뀌고 있음은 다행이라 하겠지요. 우리는 사람들이 사회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사건들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도록 도우려고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좌도 아니고 우고 아니고 단지 가난한 이들 편에 서는 거예요. 우리는 성경이 사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 편에 선다는 사실을 스스로 분명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밑바닥으로 기울어짐’(bias toward the bottom)이라 부르지요.

 

우리는 ‘빼기의 영성’(the Spirituality of Subtraction)이라는 이름으로 장기강좌를 열어서 심리학과 신학과 정치학을 한 지붕 아래 모아놓고 인간이 삶의 전 영역에서 어떻게 놓아버리기(let go)를 실현할 것인지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서양인들은, 놓아버리기를 수련할 줄 몰라요. 교회조차도 그동안 빼기보다 더하기의 영성, 은혜 입고 구원받기 위한 일방적인 행동을 가르쳤지요. 나는 늘 프로테스탄트가 이 점에서 가톨릭을 개혁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들도 우리 못지않게 고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가톨릭이고 프로테스탄트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자본주의자들이에요. 자본주의 안목으로 성경을 읽고 언제 어디서나 자기 에고를 중심에 두고서 다른 모든 것을 소비재로 삼는 겁니다. 하지만 얼마나 빠르게 ‘빼기의 영성’이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어요. 바야흐로 우리가 자기의 그늘을 알아차리고 ‘중독’에 대한 중독을 스스로 인식하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나는 봅니다.

 

무력해지기

여러분은 스스로 무력해지려고 마음먹지 않아요. 만일 누가 진지하게 마음먹고 무력해지기를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에고를 강화시킬 따름이지요.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회심시킬 수 없습니다. 회심되는 거예요. 우리는 상황이 우리에게 와서 닿을 수 있는(can get at us)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동일한 교육을 받아 동일한 편견을 지닌 백인 앵글로-색손 가톨릭이면 아무도 회심하지 않을 것이고 모두가 자기의 ‘회심하지 않은’ 단계에 머물러 있겠지요.

‘교회’로 번역되는 ‘에클레시아’란 말은 “밖으로 불려나온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려나오지(called out) 않았어요. 우리는 불려 들어왔습니다(called in). 매년 성금요일에 우리는 도시 전체를 십자가 행진으로 가득 메우지요. 행진은 법원(예수가 사형언도를 받은 곳)에서 출발하여 감옥(예수가 처음으로 쓰러진 곳)으로 이어집니다. 하나의 정치적 행위로서 십자가 행진을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당신들이 신자들을 교회 밖으로 끌어낸다.”고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제외한 모든 교회의 열성적인 사람들에 의하여 실현되는 거예요. 아마도 그분들은 교회가 교회당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주 오랜 세월을 거쳐 굳어진 것이기에 극복하기가 무척 어렵지요.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의 교회가 놓아버리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묵상기도를 가르치는 일이에요. 기초과정의 수강생들에게 자기 느낌이나 생각에 자기를 동일화시키지 않고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여러 방법들을 일러주지요. 그리스도교의 많은 기도들이 하느님에 관한 느낌이나 생각에 근거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런 기도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해는 돼요. 합리적 판단이 지배하는 왼쪽 뇌로 복음에 접근하면 그럴 수 있고 사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왼쪽 뇌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해야 해요. ‘무지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게 무서운 거지요.

이것이 영성과 결별된 신학의 단점이고 그래서 우리가 신학보다 영성에 중점을 두는 거예요.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그 반대의 길을 걸어왔어요. 그러므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분명한 신학을 등지고 신비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거예요. 이 사실을 발견할 때 많은 사람이 큰 충격을 받게 되지요.

 

내 생각에는 우리가 놓아버려야 할 것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떻게든지 성공해야 한다는 성공에 대한 강박(强迫)이고 둘째는 자기가 어떻게든지 옳아야 한다는, 신학적으로도 물론 자기가 옳아야 한다는, 정의에 대한 강박이에요. 이것은 에고의 함정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서로 다른 정의파에 의하여 쪼개지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어떻게든지 힘을 가져야 한다는 그래서 모든 것을 장악해야 한다는 힘에 대한 강박입니다. 나는 이것이 예수가 광야에서 직면하셨던 세 악마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이 세 악마를 직면하지 않는 한, 여전히 우리 안에서 그것들이 활동한다고 봐야 할 거예요. 네가 대단하고 의로운 존재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주문(呪文)으로 우리를 속이는 악마들의 이름을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호명(呼名)해야 합니다. 이것이 ‘빼기 영성’의 첫 번째 수업이에요.

이 수업으로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신화들―예를 들어 미국이 세계 최고의 나라라는 대중의 인식―을 놓아버리게 되고 머잖아 국가주의를 넘어서게 되지요. 또한 우리는 어떻게든지 더 많이 소유하고 그것들을 개인 창고에 쌓아두려는 마음을 버려야 해요. 사람마다 자기 세탁기를 따로 가져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묵상기도

우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묵상기도는 ‘향심기도’(prayer of centering)인데 미국에서 이 기도를 특별히 가르치는 곳은 트라피스트 수도회지요. 나도 거기서 배웠습니다. 밖에서 보면 불자들이 참선(參禪)하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우리가 에고를 더 강화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기도는 어떤 공동기도와도 연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동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른 곳에서 공동기도를 드리지요. 하지만 기도가 어떻게든 하나의 틀로 굳어지고 그것을 잘 지키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면 곧장 기도의 순수성과 방향성을 잃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마치고 나서 차를 마신다든지 하는 사교활동에 중점을 두지 않아요. 그럴 기회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이 기도에는 어떤 종류의 후속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일도 없어요. 그냥 말없이 앉아있는 거예요.

오늘 이 나라 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가장 든든한 형태의 ‘교회들’ 가운데 트라피스트 수도회 토머스 키팅 신부님이 주도하는 ‘묵상 출장소’(Contemplative Outreach)라든가 베네딕트 수도회 존 레인과 로렌스 프리맨 신부의 가르침에 따른 ‘그리스도교 명상을 위한 세계 공동체’(World Community for Christian Meditation) 같은 단체들이 있지요. 두 단체 모두 단순하지만 숙련된 ‘향심기도’를 드리는데 그 기도에서는 일반적인 예전(禮典)이나 장광설이 모두 배제되고 기도 자체로, 겉의 형식이 아니라 속의 본체로 곧장 들어가지요. 사람들이 자기 에고를 하느님이 넘겨받으시도록 놓아버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느님은 물론 다른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겠지요. 이 단체들한테서 우리가, 특히 서양 교회들이, 배울 게 많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놓아버림이 주는 두려움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두려움을 정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권하지 않아요. 아무도 자기 영혼을 고정시켜놓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분노와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에 자기를 동일화시키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따름이지요. 우리는 자기를 다른 무엇에 동일화시키지 않는 기술을 잃어버렸고 그 때문에 지금 중독된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겁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련생 시절에 우리는 이 ‘동일화하지 않기’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요. 하지만 최근 20년 동안 어디에서도 그것을 말할 수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물질에 얽매이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놓아버리는 법을 배워 익히지 않는 한, 우리가 그것들을 부리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를 부리게 마련이지요.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해요. 이 느낌과 생각을 지니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영적 여정은 우리를 이 ‘나’로 돌아오게 이끌어주지요. 하지만 대부분 서양 남자들과 여자들은 그것과 마주치는 적이 거의 없더군요. 그 대신 자기 생각과 느낌의 흐름에 파묻혀서 그것들과 자기를 동일화하지요. 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느낌과 생각을 억압하거나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호명하고 그것들의 정체를 밝히고 그것들을 지켜보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들과 맞서 싸우거나 그것들에 여러분을 동일화시키지는 마십시오. 이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묵상기도의 첫 걸음입니다.

 

자,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거예요. “그게 하느님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나는 하느님과 소통하는 것 또는 하느님을 찾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무엇보다도 ‘나’를 길에서 치우는 것이 기도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맞아요,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언제나 거기 계십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계신단 말이에요. 처음부터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나요? 이미 여러분 안에 계신 하느님을 길고 간절한 기도로 새삼스레 모셔 들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고요해지고 더 작아지고 자기와 함께 자기 생각이나 느낌들을 될수록 비우는 것이 전부예요. 그때 하느님의 존재가 우리 안에서 더욱 분명해지는 겁니다. 이토록 간단한 일이에요.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가르치기가 어렵긴 합니다만.

자신의 감정이나 불신(不信)을 솔직히 주님께 말씀드리세요. “하느님, 저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믿어지지가 않아요.” 바로 이것이 여러분을 비우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여러분의 ‘분개’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것을 인정하되 그것에 자신을 동일화시키지 않는 거예요.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심리학과 영성에 연결된 위대한 자유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수련센터에서 정치현실로

우리는 센터에서 수련하는 이들을 위한 목표를 미리 설정하지 않아요. 각자 수련센터를 떠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모색하지요. 물론 우리 모두가 합의하여 공동으로 가지는 ‘전제’는 하나 있어요. 사람이란 완전 중림의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존재인 만큼, 자기가 완벽하게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지요, 우리 모두 어떻게든지 힘없는 이들 곁에 머물 자리를 찾자는 겁니다.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이 우리의 교사가 될 것이고 그들이 우리를 계속 변화 발전시켜줄 거예요. 왜 우리가 이런 입장을 이토록 오래 견지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 생각에는 그것이 복음서의 유일한 지침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부터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중남미 현장에서 보듯이, 결국 이것이 우리의 정치적 입장으로 된 건 사실이에요. 로마교회 첫 2백 년 사이에 순교당한 이들보다 지난 2십 년 사이에 순교당한 이들이, 그것도 가난한 이들 편에 섰다는 이유로, 더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초대교회 때도 그랬겠지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센터에서 수련 받은 이들이 엘살바도르의 가난한 민중과 연대하고 있는데 그들 중에는 투옥된 형제들도 있지요.

우리는 모든 시민에게 불복종의 의무와 비폭력 저항의 권리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저항하라고는 말하지 않아요. 다만 현장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라고 가르칠 따름이지요.

미국의 핵 실험실 세 곳 가운데 두 곳이 이곳 뉴멕시코에 있어요. 원자탄이 제조된 로스 알라모스와 알부퀘크 바로 이웃 도시인 커클랜드가 그곳입니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 아침마다 신앙적인 물음을 던지는 포스터를 들고 노동자 8천 명이 출근하는 입구에 서 있어요. 우리가 옳다고 주장하거나 누가 틀렸다고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문제를 제기할 뿐이에요. 다행하게도 우리의 이런 시위가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과의 진지하고 격조 높은 대화를 이끌어내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이 나라에서 이루어진 유일한 대화일 거예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먼저 문제를 던지고 사람들을 대화로 끌어들이지요. 정의를 가리키는 예언자의 손가락을 저마다 가슴에 품고서.

 

세속사회와 교회 지도층의 후원을 받아

내가 비록 교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로 알려지긴 했지만 이 나라에서 가장 분주한 수련회 지도자로 불려 다닌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사람들이 왜 나를 부르는 걸까요? 내가 교회의 아들이고 교회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러기를 희망합니다. 내 신학이 든든한 바탕 위에 서 있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무책임하게 늘어놓는 자가 아님을 알고 있는 거지요. 긍정적인 비판과 부정적인 비판은 그 에너지와 성격이 사뭇 다른 거예요. 성 프란체스코와 프란체스코 영성이 나에게 한 인간이 어떻게 내면으로부터 새로워질 것인지를 아주 잘 가르쳤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직 신출내기 사제였을 때 신시내티 교구 조셉 버나딘 대주교님이 당신 날개 아래 나를 품어주셨어요. 그분은 프란체스코 성인이 당신의 새 공동체를 설립하실 때 ‘진홍의 보호자’(cardinal protector, 추기경의 보호)가 필요하셨듯이 나에게도 안내와 보호가 필요하다는 걸 아셨지요. 내가 세상에는 ‘변두리’에 선 인물로 알려졌지만, 하느님 고맙습니다, 사실은 ‘중도’(中道)에 있음을 아셨던 거예요. 교리의 핵심 진리와 사목현장 사이에 불가피한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형식과 본질을 엄정히 구분할 수 있는 그런 분을 교회에서 만나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지요. 그분이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 그 때문이었고 그래서 극우 진영의 미움을 사셨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근본바탕을 꿰뚫어보는 안목, 요람에서 무덤까지 온 생명을 존중하는 ‘솔기 없는 외투,’ 군사주의와 물질주의로 기울어지는 조국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능력 그리고 적들에 대한 그분의 무조건 용서가 모두 한 목소리로 크게 외치고 있어요, “이것이 참 복음이다!”

 

종단과의 관계

우리는 자신을 가톨릭 에큐메니스트라고 부릅니다. 우리 센터에 오는 사람들의 70 퍼센트가 실제로 가톨릭인데 이 지역 가톨릭이 다른 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이지 싶네요. 나머지 30 퍼센트는 다른 종파에 속한 이들이에요. 메노나이트와 퀘이커 신도들도 우리를 찾아오는데 그들은 우리가 가톨릭이라는 걸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들, 우리처럼 말하네?”

어쨌든 미국의 여러 수련센터들에서 각 종파의 역사적 특색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에요. 사회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 서로 다른 종파에 속했다는 사실을 모를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사회정의라는 경계를 넘으면 그때에는 서로 속한 종파와 전통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일단 목적에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앙 형식 같은 것으로 논쟁하는 일은 거의 없어지게 마련이에요.

 

오래 된 공동체와 새로운 공동체

오래 되어 상대적으로 굳어진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새로 설립된 공동체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지를 묻는 고무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요. 나는 같은 겸손과 열린 자세를 미국의 여러 자매들한테서 발견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분명 수녀님들이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어요.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수녀님들은 얌전하고 공손한 분들로 여겨졌지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수녀님들보다 강하지 못해요. 진짜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서로를 교육시키는 그런 분들이니까요. 해외에 나갔던 선교사들이 본국에 돌아와서 그분들의 눈을 가난한 자들에게로 돌려줬지요. 물론 교회 안에서는 성직자들 앞에서 아직 억압당하는 쪽에 있습니다만, 바로 그 때문에 항상 현상유지를 꾀하는 사제들보다 한 걸음 앞설 수 있었던 거예요.

수녀님들은 때로 창조적인 형태의 공동체를 개발하기도 하고 필요하면 수도복을 벗을 각오까지 되어 있지요. 실제로 그분들이 그렇게 할 때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기네 공동체가 본디 아무 교회법적 위상(canonical status)을 지니지 않았다―달리 말하여 교회의 정식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새삼스럽게 그것을 얻고자 하지도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평신도 신분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고자 독신서원을 하고서 이들 공동체로 들어오는 커플과 싱글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제3의 서품’(the Third Order)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여러분은 자기 경험과 마음을 신뢰하고 그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앞으로도 교회에는 독신으로 사는 이들이 계속 있을 것이고 그런 이들이 역사적으로 많은 결실을 거둔 것 또한 사실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공동체 생활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생활양식은 아닌 겁니다. 우리 센터에는 독신서원을 한 사람이 나 하나예요. 다른 이들은 모두 결혼을 했거나 독신서원을 하지 않은 싱글들이지요. 우리 센터는 말 그대로 평신도운동입니다. 다시 말하겠어요, 우리는 공동체 자체의 틀이나 목적을 우선적으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거두는 부산물이지요.

 

자기-치유와 사회활동

영적인 문제는 사람의 두뇌로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몸에 연관된(body-related) 치유 쪽으로 나아가되 그 과정에서 오른쪽 뇌에 비중을 더 두어야 합니다. 또한 행동을 지향하는 치료법을 찾아야 해요. 우리 센터의 이름인 ‘행동과 묵상을 위한 센터’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묵상보다 행동을 앞에 두었어요. 사람은 자기를 내어맡김으로써 배우기도 하고 치유되기도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으로도 입증할 수 없는 신앙의 행위지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을 거예요. 무엇이든지 자기 방식으로 모색해야 할 테니까요. 사람들이 이 경계를 넘기가 참으로 어렵나봅니다.

나의 ‘새 예루살렘’(New Jerusalem)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때는 성령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중심을 이루었어요. 그들은 스스로 치유되는 데 깊은 관심을 두었고 그래서 남들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뒤로 미루었지요. 먼저 자기들이 온전해져야 했으니까요. 일단 온전해지면 그때 남들을 돕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과장이 아닙니다. 그들이 치유되는 것을 그들의 나르시시즘이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지난 15년 동안 우리도 가끔 활동을 뒤로 미루고 그 자리에 치유를 둘 때가 있었어요. 우리는 자기-치유를 존재이유로 삼는 공동체가 사회에 주는 선물을 인정하되 그 분명한 한계를 보아야 합니다.

 

피라미드 아닌 원탁(圓卓)

너무 과한 전례(典禮)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양쪽 모두’ 존중받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았으면 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다가 다른 극단으로 떨어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 센터의 대부분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 있는 성체성사가 가장 중요한 전체모임이라고 말하지요. 우리는 묵상기도를 위하여 매일 모이지만 성체성사는 한 달에 한 번만 가집니다. 아주 아름다운 모임이에요. 여러 가지 선물들을 서로 주고받는 시간이거든요. 우리는 사제의 역할을 부인(否認)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특별한 명예로 여기지도 않아요. 그리스어로 ‘예배의식’(liturgy)은 “사람들의 일”(the work of the people)이지요.

우리한테 필요한 건 피라미드가 아니라 원탁(圓卓)이에요. 공동체를 이루는 건 피라미드가 아닙니다. 원탁이에요. 사제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에게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하나의 ‘형제’로 존재하는 그런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피정 지도자로 삼십 년 넘게 지내온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사제들도 자기가 늘 정상에 서고 모든 일을 집행해야 하는 시스템에서는 오히려 활기를 띨 수가 없어요. 그런 시스템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들의 영혼과 인간으로서의 성숙에 오히려 독이 되지요.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상을 비쳐주는 스크린 노릇을 해야 한다면 자신의 팽창과 수축을 조절하기가 무척 어려울 거예요.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사제들이 대중의 허황된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야 하는데 자기도 별 수 없이 모자란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아는 까닭에 그런 자신을 혐오하다가 결국 탈진상태에 빠지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